"가난하지만 정직하고 질긴 우리의 역사였다 "
롤랑의 베토벤처럼 나에게는 일연
베토벤이 <전원 교향곡>을 작곡하던 무렵의 심정을 로망 롤랑은 이렇게 썼다.
“빈에서 그는 날마다 성곽을 돌아서 산책하였다. 전원에 있을 때는 새벽부터 밤까지 모자를 쓰지 않고 해가 뜨거나 비가 내리거나 홀로 정처 없이 거닐었다. 전능하신 신이여, 숲에 있으면 나는 행복합니다. ― 거기에서는 모든 나무들이 당신의 말씀을 이야기합니다. ― 신이여, 아아, 아름다워라. 이 숲속, 저 언덕 위의 ― 고요함이여 ― 당신을 섬기기 위한 고요함이여.”(로망 롤랑, 『베토벤의 생애』에서)
전원의 아름다운 풍경은 어린 시절의 추억과 귀향의 갈망 속에서 나왔다. 갈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고통과 번뇌의 연속일 뿐이었다. 그에게 기억의 전원은 빈의 낡은 성곽을 산책하는 것으로 대신 되었다. 그런 전원이 오직 하나 안식처였다. 베토벤은 그것을 신에게 감사하고 있다. 후반부의 기도는 베토벤의 메모에 나오는 것이다. <전원 교향곡>을 작곡하던 1806년의 베토벤은 그의 생애 가운데 그나마 평안한 때를 보내고 있었다. 오래지 않아 끝날 평안은 도리어 불안한 법이다. 아름다운 숲과 고요한 언덕은 그러기에 평안과 더불어 불안을 잉태하고 있었다.
그렇기는 해도, 그래서 <전원 교향곡>은 만들어졌다. 4악장의 폭풍우가 그의 미래를 암시하고 있지만 말이다.
“경오년(1270)에 도읍이 강화도에서 나오는 난리 북새통은 임진년보다 더했는데, 시원전의 감주 심감(心鑑)선사가 제 몸을 잊고 지녀서 적들의 횡포를 벗어나 궁궐에 이르렀다. 그 공을 크게 상주고 이름난 절로 옮겨 주었는데, 지금은 빙산사에 있다. 이 또한 그에게서 직접 들은 이야기이다.”
경오년이라면 일연이 64세 되던 해였다. 각유와 심감에게서 직접 들었다는 때는 분명 이보다 뒤의 일이다. 일연은 인간이 겪은 생활 전체를 살아가는 생활인이었다. 소설가 김훈이 한 말이다. 나는 그 말의 뜻이 『삼국유사』가 쓰이는 위와 같은 과정 속에 숨어 있으리라 짐작하고 있다.
가난하지만 정직하고 질긴 우리의 역사였다
나는 일연이 살다 간 13세기를 20세기의 선험이라고 말한다. 전쟁과 식민 그리고 독재의 역사가 그렇다. 칼이 총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시대의 아픔을 치유하는 위안의 글이 『삼국유사』였다고도 말한다. 나는 『삼국유사』를 읽으며 오버랩 되는 시대의 발언을 준엄하게 본다.
어느 날부터인가 나의 카메라에는 꽃이 잡히기 시작하였다. 더러 이름을 알만한 꽃과 끝내 모르고 지나가는 꽃이 교차하였다. 이름을 아는 일이 중요하지 않았다. 몇 년을 두고 다시 찾았을 때도 거기 그 자리에 피어 있던 꽃들―. 나는 그것이 가난하지만 정직하고 질긴 우리 역사처럼 보였다.
황룡사 터에 이를 때마다 먼저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웅장하다던 구층탑보다, 아쇼카 왕이 이루지 못해 바다에 띄워 보낸 황철을 가지고 만들었다는 장육존상보다, 끝내 아들을 낳지 못해 궁에서 나온 경덕왕 부인 삼모의 비원이 서린 거대한 종보다, 거적때기 하나로 추운 겨울밤을 지새운 황룡사의 일개 승려 정수(正秀).
“겨울철 어느 날 눈이 많이 왔다. 저물 무렵 삼랑사에서 돌아오다 천암사를 지나는데, 문밖에 한 여자 거지가 아이를 낳고 언 채 누워서 거의 죽어가고 있었다. 스님이 보고 불쌍히 여겨 끌어안고 오랫동안 있었더니 숨을 쉬었다. 이에 옷을 벗어 덮어 주고, 벌거벗은 채 제 절로 달려갔다.”
기회가 날 때마다 몇 번이고 인용했던 「정수사구빙녀(正秀師救氷女 : 정수 스님이 얼어 죽을 뻔한 여자를 구하다)」조의 일부이다. 나는 이제 정수가 꽃으로 보인다. 절은 스러지고 탑은 사라졌으나 빈 터에 철마다 피는 꽃이 정수의 아름다운 영혼이 되어 산다. 작고 수줍은 듯 숨어있지만, 세상을 향해 한 마디 말도 남기지 않았지만, 로망 롤랑은 ‘비루한 대중이 받드는 공허한 우상’을 질책하였다. 시간이 그들을 모조리 없애 버리리라고 예언하였다. ‘마음으로써 위대하였던 사람’ 베토벤만이 그의 마음속에 꽉 차 있었다.
나의 마음에는 롤랑의 베토벤처럼 일연(一然)이 가득 차 있다. 적어도 지난 20년간 그랬다. 그가 살았던 곳을 찾아보고, 그가 이야기로 남긴 유적지를 둘러보면서, 한 권의 책에 어찌 이다지 다정스럽게 옹기종기 모인 이야기 식구들인지 감탄했다. 『삼국유사』에 실린 150여 가지가 통틀어 하나의 식구가 되어 있었다.
인간이 겪은 생활 전체를 살아가는 생활인
고려 왕궁에 석가모니의 치아가 있었다. 의상이 중국에 있을 때 하늘로부터 받은 것이었다. 하늘에서는 7일간만 보내준다고 하였다. 송나라에 들어 휘종 때, 도교가 성하고 불교를 탄압하면서, 이 치아를 바다에 띄워 보내버렸다. 고려의 사신이 이를 알고 배 모는 관리에게 접근하였다. 뇌물을 주고 슬쩍 넘겨받았다. 일연은 『삼국유사』의 「전후소장사리(前後所將舍利 : 여러 차례 가져온 사리)」 조에 이 일을 자세히 썼다.
삼국 시대의 이야기를 적는 책이건만, 때로 그 뒤의 사정을, 자신의 시대까지 끌고 내려오면서 정성스레 적어놓은 것이 『삼국유사』이다. 석가모니의 치아 이야기는 그 가운데 하나일 뿐. 일연 당대 임진년(1232)이라면 몽고와의 항전을 결심한 최씨 무인정권이 수도를 강화도로 옮긴 해이다. 그의 나이 26세 때였다. 이때 일연은 대구의 비슬산에 머물고 있었다. 당시로서는 석가모니 사리가 어떻게 된 줄은 전혀 몰랐고, 나중에야 ‘내전의 분수승이며 전 기림사 주지’인 대선사 각유(覺猷)에게서 들어 알았다.
“[1236] 4월에 이르러, 왕실의 원당인 신효사의 온광(蘊光)스님이 왕에게 부처의 어금니를 가져다 예불을 드리자고 청하였다. 그제야 내신들에게 궁중을 두루 살펴보라고 명령했으나 찾지 못했다. …… ‘임진년에 왕궁을 옮길 때의? 자문일기?(紫門日記)를 하나하나 뒤져보시지요.’ 3일이 지났다. 밤중에 김서룡의 집 정원의 담 안으로 물건 던지는 소리가 났다. 불을 켜고 살펴보니 곧 부처 어금니 함이었다.”
각유가 ‘몸소 본 대로 말해주면서 나에게 기록하도록 했다’고 일연은 적었다. 한 이야기가 『삼국유사』의 기록으로 정착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기록의 전말은 거기서 끝이 아니다. 일연의 붓끝을 빌려 전해지는 사랑의 실천 하나가 가슴을 때린다. 마치 예수가 전해준 착한 사마리아 사람같다.
영취사(靈鷲寺)라는 절에 대해 일연은 이런 이야기를 썼다.
재상 충원공(忠元公)이 동래의 온천에 갔다 집으로 돌아올 때였다. 굴정역(屈井驛)의 동지(桐旨) 들에 이르러 잠시 쉬는데, 문득 한 사람이 매를 날려 꿩을 쫓게 하는 것을 보았다. 꿩은 금악향(金岳香)으로 날아 지나가더니 자취가 없었다. 매의 방울 소리를 듣고 찾아갔다. 굴정현의 관청 북쪽에 있는 우물가에 이르자 매가 나무 위에 앉아 있고, 꿩은 우물 안에 있는데, 온통 핏빛이었다. 꿩은 두 날개를 펼쳐 두 마리 새끼를 감싸고 있었다. 매도 불쌍히 여기는지 잡지 않는 모양이었다.
충원공은 이를 보고 크게 깨달았다. 관청 건물을 다른 곳으로 옮기게 하고 그 땅에 절을 지었다. 신령스러운 매를 기린다 하여 이름을 영취사라 하였다. 이 또한 한 송이 꽃이 아닌가. 이제 꽃들과 인사 나눌 때가 되었다. 귀한 지면을 빌려 꽃들의 소식을 전하려 애썼으나, 얼마나 내 가슴의 박동이 울려나갔는지 모르겠다. 못 다한 이야기는 꽃 사진 몇 장으로 대신하려 한다.
* 글과 사진┃고운기_시인. 한양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1961년생, 시집 『자전거 타고 노래부르기』, 저서『우리가 정말 알아야할 삼국유사』등
"가난하지만 정직하고 질긴 우리의 역사였다 "
베토벤이 <전원 교향곡>을 작곡하던 무렵의 심정을 로망 롤랑은 이렇게 썼다.
“빈에서 그는 날마다 성곽을 돌아서 산책하였다. 전원에 있을 때는 새벽부터 밤까지 모자를 쓰지 않고 해가 뜨거나 비가 내리거나 홀로 정처 없이 거닐었다. 전능하신 신이여, 숲에 있으면 나는 행복합니다. ― 거기에서는 모든 나무들이 당신의 말씀을 이야기합니다. ― 신이여, 아아, 아름다워라. 이 숲속, 저 언덕 위의 ― 고요함이여 ― 당신을 섬기기 위한 고요함이여.”(로망 롤랑, 『베토벤의 생애』에서)
전원의 아름다운 풍경은 어린 시절의 추억과 귀향의 갈망 속에서 나왔다. 갈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고통과 번뇌의 연속일 뿐이었다. 그에게 기억의 전원은 빈의 낡은 성곽을 산책하는 것으로 대신 되었다. 그런 전원이 오직 하나 안식처였다. 베토벤은 그것을 신에게 감사하고 있다. 후반부의 기도는 베토벤의 메모에 나오는 것이다. <전원 교향곡>을 작곡하던 1806년의 베토벤은 그의 생애 가운데 그나마 평안한 때를 보내고 있었다. 오래지 않아 끝날 평안은 도리어 불안한 법이다. 아름다운 숲과 고요한 언덕은 그러기에 평안과 더불어 불안을 잉태하고 있었다.
그렇기는 해도, 그래서 <전원 교향곡>은 만들어졌다. 4악장의 폭풍우가 그의 미래를 암시하고 있지만 말이다.
“경오년(1270)에 도읍이 강화도에서 나오는 난리 북새통은 임진년보다 더했는데, 시원전의 감주 심감(心鑑)선사가 제 몸을 잊고 지녀서 적들의 횡포를 벗어나 궁궐에 이르렀다. 그 공을 크게 상주고 이름난 절로 옮겨 주었는데, 지금은 빙산사에 있다. 이 또한 그에게서 직접 들은 이야기이다.”
경오년이라면 일연이 64세 되던 해였다. 각유와 심감에게서 직접 들었다는 때는 분명 이보다 뒤의 일이다. 일연은 인간이 겪은 생활 전체를 살아가는 생활인이었다. 소설가 김훈이 한 말이다. 나는 그 말의 뜻이 『삼국유사』가 쓰이는 위와 같은 과정 속에 숨어 있으리라 짐작하고 있다.
가난하지만 정직하고 질긴 우리의 역사였다
나는 일연이 살다 간 13세기를 20세기의 선험이라고 말한다. 전쟁과 식민 그리고 독재의 역사가 그렇다. 칼이 총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시대의 아픔을 치유하는 위안의 글이 『삼국유사』였다고도 말한다. 나는 『삼국유사』를 읽으며 오버랩 되는 시대의 발언을 준엄하게 본다.
어느 날부터인가 나의 카메라에는 꽃이 잡히기 시작하였다. 더러 이름을 알만한 꽃과 끝내 모르고 지나가는 꽃이 교차하였다. 이름을 아는 일이 중요하지 않았다. 몇 년을 두고 다시 찾았을 때도 거기 그 자리에 피어 있던 꽃들―. 나는 그것이 가난하지만 정직하고 질긴 우리 역사처럼 보였다.
황룡사 터에 이를 때마다 먼저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웅장하다던 구층탑보다, 아쇼카 왕이 이루지 못해 바다에 띄워 보낸 황철을 가지고 만들었다는 장육존상보다, 끝내 아들을 낳지 못해 궁에서 나온 경덕왕 부인 삼모의 비원이 서린 거대한 종보다, 거적때기 하나로 추운 겨울밤을 지새운 황룡사의 일개 승려 정수(正秀).
“겨울철 어느 날 눈이 많이 왔다. 저물 무렵 삼랑사에서 돌아오다 천암사를 지나는데, 문밖에 한 여자 거지가 아이를 낳고 언 채 누워서 거의 죽어가고 있었다. 스님이 보고 불쌍히 여겨 끌어안고 오랫동안 있었더니 숨을 쉬었다. 이에 옷을 벗어 덮어 주고, 벌거벗은 채 제 절로 달려갔다.”
기회가 날 때마다 몇 번이고 인용했던 「정수사구빙녀(正秀師救氷女 : 정수 스님이 얼어 죽을 뻔한 여자를 구하다)」조의 일부이다. 나는 이제 정수가 꽃으로 보인다. 절은 스러지고 탑은 사라졌으나 빈 터에 철마다 피는 꽃이 정수의 아름다운 영혼이 되어 산다. 작고 수줍은 듯 숨어있지만, 세상을 향해 한 마디 말도 남기지 않았지만, 로망 롤랑은 ‘비루한 대중이 받드는 공허한 우상’을 질책하였다. 시간이 그들을 모조리 없애 버리리라고 예언하였다. ‘마음으로써 위대하였던 사람’ 베토벤만이 그의 마음속에 꽉 차 있었다.
나의 마음에는 롤랑의 베토벤처럼 일연(一然)이 가득 차 있다. 적어도 지난 20년간 그랬다. 그가 살았던 곳을 찾아보고, 그가 이야기로 남긴 유적지를 둘러보면서, 한 권의 책에 어찌 이다지 다정스럽게 옹기종기 모인 이야기 식구들인지 감탄했다. 『삼국유사』에 실린 150여 가지가 통틀어 하나의 식구가 되어 있었다.
인간이 겪은 생활 전체를 살아가는 생활인
고려 왕궁에 석가모니의 치아가 있었다. 의상이 중국에 있을 때 하늘로부터 받은 것이었다. 하늘에서는 7일간만 보내준다고 하였다. 송나라에 들어 휘종 때, 도교가 성하고 불교를 탄압하면서, 이 치아를 바다에 띄워 보내버렸다. 고려의 사신이 이를 알고 배 모는 관리에게 접근하였다. 뇌물을 주고 슬쩍 넘겨받았다. 일연은 『삼국유사』의 「전후소장사리(前後所將舍利 : 여러 차례 가져온 사리)」 조에 이 일을 자세히 썼다.
삼국 시대의 이야기를 적는 책이건만, 때로 그 뒤의 사정을, 자신의 시대까지 끌고 내려오면서 정성스레 적어놓은 것이 『삼국유사』이다. 석가모니의 치아 이야기는 그 가운데 하나일 뿐. 일연 당대 임진년(1232)이라면 몽고와의 항전을 결심한 최씨 무인정권이 수도를 강화도로 옮긴 해이다. 그의 나이 26세 때였다. 이때 일연은 대구의 비슬산에 머물고 있었다. 당시로서는 석가모니 사리가 어떻게 된 줄은 전혀 몰랐고, 나중에야 ‘내전의 분수승이며 전 기림사 주지’인 대선사 각유(覺猷)에게서 들어 알았다.
“[1236] 4월에 이르러, 왕실의 원당인 신효사의 온광(蘊光)스님이 왕에게 부처의 어금니를 가져다 예불을 드리자고 청하였다. 그제야 내신들에게 궁중을 두루 살펴보라고 명령했으나 찾지 못했다. …… ‘임진년에 왕궁을 옮길 때의? 자문일기?(紫門日記)를 하나하나 뒤져보시지요.’ 3일이 지났다. 밤중에 김서룡의 집 정원의 담 안으로 물건 던지는 소리가 났다. 불을 켜고 살펴보니 곧 부처 어금니 함이었다.”
각유가 ‘몸소 본 대로 말해주면서 나에게 기록하도록 했다’고 일연은 적었다. 한 이야기가 『삼국유사』의 기록으로 정착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기록의 전말은 거기서 끝이 아니다. 일연의 붓끝을 빌려 전해지는 사랑의 실천 하나가 가슴을 때린다. 마치 예수가 전해준 착한 사마리아 사람같다.
영취사(靈鷲寺)라는 절에 대해 일연은 이런 이야기를 썼다.
재상 충원공(忠元公)이 동래의 온천에 갔다 집으로 돌아올 때였다. 굴정역(屈井驛)의 동지(桐旨) 들에 이르러 잠시 쉬는데, 문득 한 사람이 매를 날려 꿩을 쫓게 하는 것을 보았다. 꿩은 금악향(金岳香)으로 날아 지나가더니 자취가 없었다. 매의 방울 소리를 듣고 찾아갔다. 굴정현의 관청 북쪽에 있는 우물가에 이르자 매가 나무 위에 앉아 있고, 꿩은 우물 안에 있는데, 온통 핏빛이었다. 꿩은 두 날개를 펼쳐 두 마리 새끼를 감싸고 있었다. 매도 불쌍히 여기는지 잡지 않는 모양이었다.
충원공은 이를 보고 크게 깨달았다. 관청 건물을 다른 곳으로 옮기게 하고 그 땅에 절을 지었다. 신령스러운 매를 기린다 하여 이름을 영취사라 하였다. 이 또한 한 송이 꽃이 아닌가. 이제 꽃들과 인사 나눌 때가 되었다. 귀한 지면을 빌려 꽃들의 소식을 전하려 애썼으나, 얼마나 내 가슴의 박동이 울려나갔는지 모르겠다. 못 다한 이야기는 꽃 사진 몇 장으로 대신하려 한다.
* 글과 사진┃고운기_시인. 한양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1961년생, 시집 『자전거 타고 노래부르기』, 저서『우리가 정말 알아야할 삼국유사』등